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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장윤창 프로필|나이|고향|향년|사망 원인|가족 관계|아들|

by 스포츠김감독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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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장윤창 프로필|나이|고향|향년|사망 원인|가족 관계|아들|


장윤창은 대한민국 배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1978년 인창고 재학 중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며 화려한 배구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강한 체공력과 유연한 몸놀림, 그리고 왼손잡이라는 희소한 장점을 앞세워 국내외 무대에서 활약하며 ‘돌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세터로 시작했지만 공격수로 전향한 후 라이트 포지션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배구의 전성기를 이끌며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세계선수권 4강 진출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실업팀 고려증권에서도 오랜 시간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은퇴 후에는 체육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힘쓰며 행정가로도 활약해 한국 배구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이름

장윤창

 

◎ 생년월일

1960년 9월 10일

 

◎ 사망

2025년 5월 30일

◎ 나이 / 향년

64세

 

고향 / 출생지

충청남도 논산시

◎ 신체

195cm

 

 

◎ 학력

송산중학교 (졸업)

인창고등학교 (졸업)

경기대학교 예체능 대학 (체육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

◎ 주 포지션

아포짓 스파이커 / 세터 

 

◎ 소속팀

고려증권 배구단 (1983년 ~ 1994년)

 

◎ 가족관계

배우자

아내

첫째 아들

장대한 (2013년 별세)

둘째 아들

장민국 (창원 LG 세이커스 농구 선수)

◎ 종교

미상

 

◎ 사망원인 / 사인

위암 투병

◎ 빈소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 발인

6월 1일 오전 5시 30분

 

 

◎ 생애

장윤창은 대한민국 남자 배구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978년 인창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며 배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세터 포지션이었으나, 이후 공격수로 전향하면서 왼손잡이라는 장점을 살려 주로 라이트 포지션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오른손 사용 능력도 뛰어나 양손잡이에 가까운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장윤창은 국가대표로 선발된 해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 이인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첫 4강 진출을 이끌며 국제 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같은 해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도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하며 꾸준한 성과를 이어갔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도 그는 핵심 선수로 참가했습니다. 한국은 당시 5승 1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나, 세트 득실률에서 밀려 아쉽게 4강 진출에 실패하며 최종 5위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실제 경기 내용과 성과만으로 보면,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을 제외하고는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국내 무대에서는 실업 배구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1983년 고려증권 배구단의 창단 멤버로 참여해 실업 리그 인기를 견인했으며, 1984년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는 첫 대회 MVP를 수상했습니다. 이후에도 1990년 MVP에 선정되었고,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 연속 인기상을 받는 등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실전에서 스카이 서브, 즉 스파이크 서브를 국내 남자 배구 선수 중 가장 먼저 구사하며 기술적인 진보를 이끌었습니다.


195cm의 장신에 유연한 허리와 뛰어난 체공력을 바탕으로 한 백어택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어택 라인 밖에서 점프해 몸을 뒤로 젖히며 강력한 공격을 펼치는 독특한 스타일로, ‘돌고래’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팬들은 그의 플레이에서 강력한 파워와 예술적인 곡선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자기 관리에 있어서도 그는 모범적인 선수였습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34세인 1994년까지도 현역으로 활약했고, 이는 동시대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속 팀인 고려증권의 선수층이 탄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팀워크와 개인 역량으로 리그에서 꾸준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은퇴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또한 대한배구협회 기술이사,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위원, 대한민국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 등 다양한 행정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한때 고려증권 배구단의 코치를 맡기도 했으며, 이후 논산에서 볼링장을 운영하는 등 개인 사업도 진행했지만, 다시 교육과 체육계로 돌아와 본업에 충실했습니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봉사활동 단체를 구성해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장민국은 연세대학교 출신의 농구선수로, 2012년 프로농구 드래프트에서 전주 KCC(현 부산 KCC)에 지명되었으며 현재는 LG 세이커스 소속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장윤창의 가문은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가족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건강에도 철저했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해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2025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으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6월 1일 오전 5시 30분으로 알려졌습니다.


장윤창은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행정가로서 한국 배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스타를 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그리움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장윤창 교수는 뛰어난 기량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한국 배구의 황금기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선수 시절의 눈부신 활약은 물론, 지도자와 교육자, 행정가로서도 후배 양성과 스포츠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돌고래’라는 별명처럼 유연하고도 강렬한 경기 스타일은 수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봉사와 사회활동에 힘쓰며 진정한 스포츠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단지 한 명의 배구 선수를 넘어 한국 스포츠계의 귀중한 자산이었습니다. 장윤창이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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